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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장찌개 같은 인생 >

소설

by 초록별🌱 2020. 11. 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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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식탁에는 툭하면 된장찌개가 올라왔다. 된장을 푼 물에 갖가지 자투리 재료들을 있는 대로 죄다 넣고 끓이면 완성되는 간단한 조리법이지만 특유의 깊은 맛은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게 만든다. 어렸을 때부터 된장찌개를 참 좋아했다. 직접 제 손으로 만들어본 요리도 된장찌개였을 정도로 좋아했다. 메주로 간장을 만들어 장물을 떠내고 남은 찌꺼기가 된장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근래의 일이었다.

 

 잠에서 깨어났다. 눈은 감은 채로 바닥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혼수상태에서 몇 년 만에 깨어난 것 마냥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했다. 몇 걸음 걸으니 주방이다. 첫 직장에 취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되었을 때는 이 정도로 작진 않았던 것 같다는 실없는 생각이 냉수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갈증이 가시지 않아 냉장고에서 반쯤 비워진 하나 남은 2리터 생수병을 꺼내어 뚜껑을 열고 입을 대고 마셨다. 있던 양의 또 반쯤 비워진 생수병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방을 둘러보았다. 침실, 거실, 주방. 화장실을 제외하고 어느 하나 구분 없는 네모난 방 한 칸. 방 안에 가구라고는 싱글 침대 하나와 좌식 탁자 하나뿐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목을 쬐는 넥타이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굳어져버린 표정을 달고 창가로 다가가 굳게 닫혀있던 창을 활짝 열어보았다. 11월. 새벽이 차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물 살 돈도 없는 마당에 몇 잔 마시면 금세 동이 나는 걸 아까워서 어찌 제 돈으로 사 마시리. 그럼에도 속은 여전히 시큰거리고 입 안은 금세 메말랐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우당탕탕-! 쿵, 쿵, 쿵.'

 또 잠에 들었나.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세 시간이 더 지나있다. 요즘 잠이 늘었다. 나는 여기 멈춰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덧없이 잘도 흘러간다.

'쿵! 쿵, 쿵, 쿵.'

 주말에만 들을 수 있었던 위층의 소음은 평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던 거였나 보다. 몇 달 전만 해도 '층간소음이네', '부실공사네'하며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막상 윗집에 찾아갈 용기는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려고 했었다. 충분히 자고 난 지금은 짜증은커녕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기분이 어쩌고, 저쩌고. 대강 아이와 아이의 엄마가 아침 실랑이를 벌이는 듯하다. 귀가 트이니 이번엔 후각이 깨어났다. 열어둔 창을 통해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온 각종 음식 냄새들이 방 안을 은근하게 채운다. 빈 속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보다 더 큰 소음을 만들었다.

 후루룩.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언제 이 방에 들어왔었나 싶을 정도로 자극적인 라면의 조미료 향이 방을 가득 채우고 나의 빈 속도 함께 채웠다. 싱크대에는 기름때가 잔뜩 묻은 그릇과 접시들로 이미 가득했다. 차마 그곳에 더 쌓아두진 못하고 주방대 위에 냄비를 내려놓으니 이번엔 빈 라면봉지가 보였다. 봉지를 집어 들어 베란다 쓰레기통에 구겨 넣을 참으로 가보니 그곳도 이미 수용 초과된 지 오래다. 싱크대와 쓰레기통을 번갈아 바라보니 절로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띵-. 엘리베이터 안에는 기름 진 까치머리에 눈이 퀭한 아저씨 한 명이 서있었다.

'쯧-. 마치 시체 같군.'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제법 날이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외투 한 장 없이 전체적으로 늘어나고 해어진 얇은 긴소매 옷 한 장만을 걸치고 있다. 검은 트레이닝 반바지 밑으로는 볼품없이 마른 두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은 인상을 더욱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남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모양새다. 머리라도 마른 손으로 정리해볼까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고 양 손에 들린 쓰레기로 가득 찬 봉투를 고쳐 든 채 뒷굽이 많이 닳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아무리 집에만 이었다고 해도 11월의 바람이 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쓰레기봉투만 휙 던져놓고 곧장 들어갈 생각이었다. 분리수거 정신이 투철한 저 아이만 아니었다면 실행될 계획이었다.

"앗! 아저씨, 그 병뚜껑은 플라스틱이 아니잖아요!"

 어린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은 여자아이가 외쳤다.

"... 하아."

 뻘쭘하게 플라스틱이라 쓰인 통에  병을 넣으려던 손을 멈추고 뚜껑을 열었다.

'어느 부모인진 몰라도 가정교육을 아주 제대로 시켰군.'

 검은 네 개의 똘망한 눈에 감시당하는 이 상황은 참으로 모양 빠졌다. 처음엔 무시하고 가려했다 옆에서 헛기침하는 경비 할아버지의 눈치에 못 이겨 이러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경비 할아버지도 어디론가 가버렸으니 이만하고 들어갈까 틈을 보았다.

"어라? 기쁨이랑 행복이. 좋은 아침~"

 "기찬 오빠!"

"기탄 엉아!"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하하.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죠."

"아직 유치원 안 갔으니까 괜찮아요."

"응! 갠타나여."

"음. 그럼 이따 유치원 오면 그때는 선생님이라고 해야해?"

"네~"

 이때다 싶어 손에 든 쓰레기봉투를 아무대나 놓고 조용히 뒤돌아섰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요? 쓰레기 버리러 온 거예요?"

"네. 근데 저기 아저씨가 분리수거 못하길래 선생님한테 배운 거 제가 알려주고 있었어요! 히히."

"아이구, 정말? 기쁨이 참 착하다."

 쯧, 저 자식이 문제였군.

저도 모르게 뒤돌아봤다가 선생님이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문득 아침에 들었던 건 '기분'이 아니라 '기쁨'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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