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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을 가리는 자 >

소설

by 초록별🌱 2020. 11. 18.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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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가 태어났다. 아니. 공주'들'이 태어났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왕가에서 그토록 바라던 신의 축복이었다. 뒤에서 수근대는 말로는 축복일지 저주일지 아무도 모를 일이란다. 왕가에서는 대대로 단 한 명의 아이만 태어났다.  (혹자는 왕비가 아이를 낳으면 왕의 정관을 묶어 불임의 몸을 만드는 것이 왕가의 풍습이라 믿는다.) 그 아이가 요절하지 않는다면 왕의 후계자가 되어 장차 왕위를 잇게 된다. 여기서 하나 특이점은 그 아이들이 지금껏 전부 남성이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여왕이 즉위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왕좌는 단 하나뿐. 과연 둘 중 누가 여왕의 자리에 오를 것인가! 또 다시 뒤에서 수근대는 말로는 알만 한 사람들은 이미 줄을 섰다고 한다.

 왕과 왕비는 빈 말로도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껏 왕좌에 앉은 이는 전부 남성이었다. 고인 물은 알게 모르게 악취를 풍기며 썩기 마련. 남성주의의 악습이 하나 둘 모이고 모여 남성우월주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만연해있는 왕국이었다. 다만 지리적 풍수가 좋고 협상에 능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도 이 왕국이었다. 그에 비해 왕비가 공주로 있었던 소국을 먹여살리는 것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검은 보석의 갱이었다. 왕국의 지위와 왕의 얼굴만 보고 혼인을 결정했던 작은 나라의 공주와 사치에 빠져 보석에 눈이 멀었던 권위주의적인 왕자가 만나 이십 여년을 아이도 없이 지냈다. 서로에게 일말의 좋은 감정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을리 만무했다. 자국의 수행원 다섯 명으로 시작하여 암암리에 조금씩 키워가던 왕비의 세력은 이제 왕과 대등할 정도였다. 호전적인 이들은 왕가에서 일어날 쿠데타를 기대하지만 사실 왕비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결과가 어찌되었던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고, 왕국이 자신의 고향, 소국에 주고 있는 도움이 작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이 평화를 제 손으로 깰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간간이 신경을 거슬리는 왕과 그 신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잉태된 것이다. 시작은 사소했다.

 왕은 당연히 남자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 귀족들도 전부 아이가 남자라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도 된 양 축하를 건네었다. 왕비가 입을 열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성별을 단언하다니 경은 신관이라도 되는가 보오?"

"하하하! 지혜롭고 자애로운 왕비님. 친애하는 왕비님. 왕비님 곁에는 천 근 같은 입을 가진 자들만 있었나봅니다."

"무슨 말이오?"

"이 왕국의 왕가에선 대대로 남아만 잉태되어 태어난다는 건은 지나가는 어린 백성도 알 정도로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지금까지 그래왔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면 어떤 흥성도 기대할 수 없겠군."

 왕비는 주어를 대진 않았지만 누구를 지칭하는 지는 자명했다.

"그대의 말이 맞다. 나의 곁에는 천 근 같은 입을 가진 자들만 있었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던 이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숙인 고개를 차마 들 수 없었다. 이 상황을 흥미롭게 방관하던 왕이 호탕하게 웃더니, 눈가엔 작은 물방울을 단 채 입을 떼어다.

"왕비. 다노아 경은 지금껏 많은 공을 세웠다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많은 공을 세울 것이오. 그렇지않은가?"

 왕비를 보면 말을 하던 왕이 고개를 돌려 묻자 다노아 경은 아예 엎드려 반드시 그러겠노라고 반복했다. 흰머리가 흐끗한 이에게서 눈을 떼어 여전히 아름답지만 차가운 눈동자의 왕비를 쳐다보는 왕의 얼굴에는 만족이 충만했다. 허나 왕비의 눈에는 불경하게만 보였다. 왕의 안일한 가치관도, 오만한 태도도,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작은 소동은 예삿일이라 불려졌을테지만 오늘은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을 뿐, 왕비의 이야기도, 왕의 이야기도, 공주들의 이야기도 아닌 어느 꼬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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