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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 >

소설

by 초록별🌱 2021. 1. 4.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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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뭐야, 진짜."

 입술을 삐쭉이며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기분이 썩 좋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도 터져 나왔다. 슬픔 속에서 나를 구원해 주는 백마 탄 왕자님은 아니어도 영웅이라 불러줄 의향 즈음은 생겼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 '영웅'이었으니까.

"웅이, 웅이, 영웅이~."

 또래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그는 언제나 활기 찬 모습으로 모두를 선두 하는 행동 대장이었다. 그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고, 그가 하는 말이 곧 시(是, 옭거나 맞는 것)가 되었다. 그런 그와 내가 엮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말아 주길. '나랑 사는 세계가 달라, 나 같은 거랑 어떻게 어울리겠어.' 하는 자기 비하를 하려는 게 아니다. 같은 사람인데 뭘 그리 잘나고 못날 것이 있을까. 그저 나와 그는 성격이 서로 달라 잘 어울리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말을 섞어보기 전까지는.


 오랜만에 집에서 쫓겨난 날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언제 쫓겨날지 몰라 항상 긴장 상태로 대비를 했을 텐데, 이사를 하고 난 후로는 집안이 평화로웠다. 아니. 사실은 저 깊은 곳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평화롭다고 착각했었다. 얇은 티 하나와 잠옷 바지로 맞이하는 가을 밤바람은 매서웠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무 생각도 걱정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조금 멀리 떨어진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스탠드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가로등 밑에 술판을 벌이는 한 철없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이 야밤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술판을 벌인 것도 모자라 이따금씩 우레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낄낄대고 있었다. 가로등 불에 비추어지는 인영으로 보아 대여섯 명은 되어 보였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영웅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크고 행동도 컸다. 딱히 나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에게 관심이 없었던 나였지만 그날 밤 평소보다 들떠 마치 춤을 추듯 과장되게 그리고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는 그와 그의 친구들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팔다리를 과하게 사용하여 무언가 열변을 토하던 그는 결국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뒤로 자빠졌다. 그의 친구들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고 그를 지켜보던 나 또한 웃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 그는 흙먼지를 털더니 내 쪽으로 걸어왔다. 정확히는 내 근처에 있던 수돗가 쪽으로 걸어갔다. 물을 틀어 손을 씻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슬슬 돌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 일어서는 나를 알아챈 그가 뒤를 돌아봤다.

"어? 너는..."

 갑자기 뒤돌아봐서 놀랐는데, 나를 알고 있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랬다. 그는 내 이름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안녕?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우리 수업 몇 번 같이 들었지?"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던 내게 그는 거리낌 없이 인사를 해왔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너도 소원 빌러 온 거야?"
"소원?"
"오늘 별똥별을 볼 수 있다길래 소원 빌러 나왔거든, 난."

 별똥별... 스무 살이 넘어서 유성을 별똥별이라고 칭하며, 소원을 빌러 나왔다는 그의 말에 어쩐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가 이번에는 정말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스탠드에 철퍼덕 누워버렸다. 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에 엉거주춤 서있던 나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그를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반짝이는 별이 무수히 수놓아진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예쁘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쩌면 아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단언컨대 근 몇 년 동안은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본 적이 없다. 무의식적으로 대기오염으로 별 하나 제대로 안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나는 아름다운 밤하늘이 꽤나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넋을 놓고 구경하고 있던 나는 돌연 들려오는 그의 웃음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뭘 빌고 싶어?"
"응?"
"소원 말이야. 별똥별에 빌 소원!"

 소원이라.. 이루어만 질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빌 수 있으리라.

"없어."
"바라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바라는 거야 많지."

 그는 이해가 안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별똥별에 빌 소원이 없다는 말이야. 별똥별에 빌어봤자 저 멀리 있는 별똥별은 이루어 줄 수 없잖아. 소원은 이루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는 대상에게 빌래."
"그게 누군데?"

 별생각 없이 내뱉은 나의 말에 그가 질문을 던질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잠시 뜸을 들여 대답해주었다.

"나."
"정말? 너에게 소원을 빌면 내 소원을 이뤄줄 수 있어?"

 그의 눈이 반짝였다. 왠지 장난을 치고 싶어 졌다.

"네 소원이 뭔데?"
"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술에 취한 그는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의 말에 동조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소원을 비는 거야?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응?"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아. 쓰레기 같은 놈들도, 개 같은 놈들도 너무 많다고."

 그는 눈이 동그래졌다. 머쓱해진 난 다시 별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그런 사람들의 행복까지 빌어주고 싶지 않아."

 나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헤아려보았다. 서른 개 즈음 세었을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의외로 낮은 목소리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노래를 이어갔다.

I did it all for her, so I felt nothing at all
I don't know what she'll say, so I'll ask her when she calls
Would you love me more, if I killed someone for you
Would you hold my hand, they're the same ones that I used when I killed someone for you


 그 후 우연히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인사할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난 멈추지 않고 걷어 그를 지나쳤다. 그 또한 나에게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어쩌면 술에 취한 그 날 일을 그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번호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다시 봐도 내가 쓰는 사물함이 맞다. 그런데 전에 없던 스티커가 문짝에 붙어있다. 색종이를 오려 풀로 어설프게 붙어져 있는 별 모양 스티커 위에는 초등학생보다 더 삐뚤어진 악필이 쓰여있었다.

[Because I am a hero]

"아. 이게 뭐야, 진짜."

 입술을 삐쭉이며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기분이 썩 좋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도 터져 나왔다. 슬픔 속에서 나를 구원해 주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릴 나이는 지났다. 그는 야심한 밤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술판을 벌이는 히어로였다.






안녕하세요. 블로그를 운영하는 초록별이라고 합니다.
사진과 글을 제가 직접 촬영하고 작문한 것입니다.
미숙한 솜씨지만 열심히 편집하고 작성한 것이니
예쁘게 봐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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